기분이 나쁜 것도 아닌데 마음이 가라앉는 날
아무 일도 없었는데 아침부터 괜히 무기력한 날이 있어요. 눈은 떴는데 다시 감고
싶고, 일어날 힘도 딱히 없고, 괜히 숨이 깊어지는 그런 아침이요. 몸은 멀쩡한데
마음이 맥을 못 잡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어요.
사람들이 우울하면 슬픈 거라고 생각하잖아요. 근데 저는 꼭 슬픈 게 아니라 그냥
아무 감정이 없어지는 게 더 힘들었어요. 누가 뭐라고 해도 반응이 없고, 좋아하던
노래도 귀에 안 들어오고, 먹고 싶은 것도 떠오르지 않는 그런 날이었어요.
그럴 때는 억지로 뭘 하려고 해봤어요. 기분 전환이 좋다니까 카페에 가거나 영화도
보고, 친구랑 전화도 해봤는데 마음이 움직이지 않았어요. 나한테 맞지 않는 방법을
계속 시도하니까 더 지치더라고요. 어느 순간부터는 포기하게 됐고, 그게 오히려
시작이었어요. 마음을 조용히 두는 것, 그게 필요했더라고요.
몸이 아니라 마음이 쉬고 싶을 때가 있어요
예전에는 이런 날이면 스스로를 자꾸 다그쳤어요. 왜 이러고 있냐, 빨리 씻고 뭘
하든 해야 하지 않냐, 게으른 거 아니냐. 그런 식으로 스스로를 몰아붙이면 뭐라도
되겠지 했어요. 그런데 하루를 그렇게 보낸 날은 더 무너져 있었어요. 할 수 있는
일이 아무것도 없었거든요.
그래서 이제는 그런 날엔 그냥 누워 있어요. 커튼도 안 열고, 불도 안 켜고, 조용히
침대에 누워 있어요. 시간을 확인하지도 않고 그냥 눈을 감고 있으면서 지금 이
감정이 뭔지 가만히 느껴보려고 해요. 물론 하루가 그렇게 지나가면 뭔가 손해 본
것 같고 허무한 기분이 들기도 해요. 근데 몸이 아니라 마음이 쉬고 싶었던 거라는
걸 받아들이니까 그 하루가 조금씩 달라지더라고요.
사람이 감기에 걸리면 쉬는 것처럼, 마음이 아프면 그 마음도 쉬어야 해요. 그걸
이해하는 데까지 시간이 좀 걸렸어요. 아무것도 안 해도 되는 날이 있다는 걸
진짜로 받아들이기까지 참 오래 걸렸어요. 그걸 받아들이니까 다음날 아침에 조금은
덜 무거운 마음으로 눈을 뜰 수 있었어요.
기분이 아니라 감정의 원인을 바라보기
감정이 쌓인다는 표현을 예전엔 잘 몰랐어요.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보면 하루에도
수십 가지 감정이 오고 가는데, 그걸 다 해소하지 못한 채 넘기다 보면 어느 순간
그게 한꺼번에 올라오는 것 같았어요.
우울한 날엔 그냥 우울하다고만 느끼지 않고, 왜 그런지 생각해보려고 했어요. 그게
처음엔 잘 안 되더라고요. 그래서 저는 노트를 꺼내서 적기 시작했어요. 뭐 대단한
문장이 아니에요. 그냥 오늘 왜 힘든지, 뭐가 마음에 걸리는지, 왜 그런 감정이
생겼는지 솔직하게 적었어요. 거기에 맞춤법도 없고, 문장도 없고, 그저 마음이
흐르는 대로 쓰는 거죠.
신기하게도 그걸 쓰고 나면 마음이 조금 정리돼요. 원인을 모른 채 우울했던 감정이
조금은 윤곽이 생기고, 그게 풀릴 구석이 생겨요. 울컥했던 마음도 가라앉고,
생각보다 내가 그렇게 복잡한 상태는 아니었구나 싶을 때도 있어요. 그렇게 감정을
붙잡아보는 시간이 저한테는 꼭 필요했어요.
해야 할 일은 잠시 내려놓아도 괜찮았어요
우울한 날엔 해야 할 일이라는 말이 너무 버겁게 들려요. 그 단어만 봐도 숨이
가빠지고 머리가 무거워져요. 리스트를 펼쳐보면 하나하나가 너무 큰 산처럼
느껴지더라고요. 그걸 생각만 해도 지쳐버리는 거예요.
그래서 저는 그런 날엔 계획을 아예 내려놓기로 했어요. 오늘 아무것도 안 해도
괜찮다고, 그냥 있는 그대로 있어도 된다고 나한테 말해줘요. 하루를 완전히
비워버리면 오히려 조금 여유가 생겨요. 이상하게도 그렇게 마음을 놓아버리면 해야
할 일도 나중에는 스르륵 하게 되더라고요. 억지로 움직이려 하지 않아도,
자연스럽게 손이 움직이는 때가 와요.
그게 나중에 늦어질 수도 있고, 계획이 조금 밀릴 수도 있지만 그래도 괜찮아요. 그
하루를 억지로 버티는 것보단 그렇게 마음을 쉬게 해주는 게 훨씬 효과적이었어요.
우울한 날엔 뭘 해야 하느냐보다, 뭘 안 해도 괜찮은지를 먼저 생각해보게 돼요.
우울함은 없애는 게 아니라 지나가도록 두는 것
처음엔 이 우울한 감정을 빨리 없애고 싶었어요. 어떻게든 없애야만 내가 다시 살
수 있을 것 같았거든요. 근데 그럴수록 감정은 더 짙어졌어요. 애써 외면한 감정은
더 커지고, 억누른 감정은 결국 어느 순간에 터지더라고요.
그래서 이젠 우울함을 없애려 하지 않아요. 그냥 옆에 두고 있어요. 아 오늘은 네가
왔구나, 같이 있어보자, 그렇게 마음속에서 말해줘요. 그러면 이상하게도 그 감정이
날 삼키진 않더라고요. 불편하긴 해도 견딜 수는 있어요.
시간이 지나면 조금씩 가라앉고, 그 자리엔 말랑한 감정이 남아요. 다 나았다고
말할 수는 없어도, 숨은 좀 쉬어지게 돼요. 그래서 지금 이 글을 읽고 있는
누군가가 오늘 그런 날이라면, 너무 애쓰지 않아도 괜찮다고 말해주고 싶어요.
무리하지 않아도 돼요. 지금 이 상태로도 충분히 잘하고 있어요.

